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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온도1.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소록도에서의 치과의사 27년

Essay 315.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소록도에서의 치과의사 27년

몇 년전 가족들과 고향에 가는 길에 소록도에 들른 적이 있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정원을 보았고 다른 한편으로 감옥, 강제 정관 수술장과 수술도구 등 참혹한 것들도 많이 보았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의 모든 한센인들이 강제로 끌려왔던 곳이고, 이곳에 원래 살던 원주민들은 보상 한푼없이 다른 곳으로 쭂겨가야했던 한이 서린 곳이기도 하였다. 특히 정상인들은 나병으로 인해 이곳으로 오는 것을 극히 꺼렸을 일이지만 오히려 이곳이 자신이 있어야할 가장 좋은 곳이라고 하면서 27년을 지내온 치과의사가 있어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대우재단은 지난 12월 9일 소록도(한센인의 섬)에서 27년째 근무중인 오동찬 치과의사에게 김우중의료인상을 수여하였다.

군복무 대신하는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는 지역을 자원할 때 처음에 오동찬은 코이카 해외 근무(중국이나 동남아 오지)를 지원하였지만 코이카(KOICA)에서 그 해에 치과의사는 뽑지않았다. 차선책으로 그는 희망지 리스트 가장 마지막에 있는 소록도를 자원하였다. 친구들과 가족의 반대가 심했다. 후배들은 “형 미쳤어? 왜 그런 데를 가? 거긴 나환자들이 있는 무서운 곳이야!”라고 말했고,어린 시절 주변에 한센인이 있어 두려움을 느끼면서 자란 어머니는 “이 어미 눈에 흙이 들어가면 가라”고 하시며 심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1년만 하다가 다른 곳으로 옮길께요 라고 가까스레이 어머니를 설득하여 기어코 소록도로 부임하였다.

특별한 이유라기 보다는 어려운 지역에서 한번 해보고 싶었던 그는 소록도에서 근무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았다. 나병은 전염병이 아니었다. 결핵 예방주사만 맞으면 99.9%이상이 나병을 예방할 수 있다. 결핵과 유사했으나 결핵보다는 100배나 약한 균이었다. 혈액속에 있는 나균은 외부로 나오면 즉시 사멸되버려 나균은 배양하기 어려울 정도로 약한 균이었다. 1년 후 함께 지원한 의사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가도 오동찬은 그대로 소록도에 있었다. 그러자 눈물을 흘리면서 반대하셨던 그의 어머니가 소록도로 찾아왔다. 그는 어머니를 환자들이 사는 마을로 안내해주었다. 어렵게 살아가는 환자들을 보면서 어머니는 오동찬에게 말했다. “미안하다. 그때 못가게 해서. 주민들을 엄마 대하듯 잘해드려라.” 그 말을 남기고 그곳을 떠난 어머니는 3개월 후에 지병인 암으로 사망하였다. 사람들은 자신을 훌륭한 의사라고 하지만 암에 걸린 어머니를 곁에서 모시지 못한 불효는 오동찬의 가슴속에 늘 남아있다.

처음 소록도에 갔을 때 무료로 수술도 해드리고,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틀니도 해드리고, 많은 일을 했는데도, 그분들로부터 ‘고맙다’라는 말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 물론 그 말을 듣기 위해서 한 건 아니었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이유를 여쭤보았더니, “오선생도 1년 있다가 갈 건데…”라고 하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소록도에 온 의사들이 늘 1년만 있다가 떠났기에 정을 주었다가 입는 상처가 너무 커서 정을 잘 주지 않으셨던 거였다. 그래서 처음에 마음을 열지 않고, 정을 주지 않아서 오동찬은 좀 힘들었다. 그 말을 들은 이후로 진료가 끝나면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의 빨래와 청소를 도와드렸다. 한 날은 그렇게 도와드리다가 함께 밥을 먹었던 적이 있는데, 다음날 이 소식이 섬에 소문이 났고, 그 다음날 그리고 그 다음날 다른 할아버지들께서 식사를 권하셨다. 그는 자신을 불러주는 대로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밥을 맛있게 먹었다. 그제야 소록도 주민들은 그를 ‘오선생’이라며 친근하게 불러주기도 하였다.

그는 소록도에서 간호사인 아내를 만났고, 두 딸을 낳아 그곳에서 기르고 있다. 그는 여기보다 더 나은 생활은 없다고 말한다. 마음을 터놓고 의사를 신뢰하는 환자를 보는 의사보다 행복한 의사가 어디에 있겠느냐고 한다고 할 정도로 소록도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1995년 공중보건의로 소록도에 온 이래 급여와 대학강의료를 한센인 치료 비용으로 보태기도 하였다. 안면 기형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안면 재건 수술과 의치, 보철 시술 등을 지원하기도 하였고 아랫입술 재건 수술법을 개발하여 500명을 치료하기도 하였다. 1950년대 일제 강점기에 한센인들을 소록도로 고립시켜 일본공주의 방문을 위해 강제노역으로 공원을 조성하는등 인권을 침탈할 때는 6254명까지 수용하기도 하였다. 지금은 한센인들은 모두 치료가 되었고 병자는 없다. 치료된 한센인들 475명이 살고 있다. 일단 소록도로 들어오면 평생 가족들과 이별하였고 외로움 속에서 살아온 한센인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준 오동찬은 참의사의 길을 걷고 있다.

오동찬은 고등학교 영어 수업 시간에 슈바이처에 관해 배우게 되었고, 그때 슈바이처 같은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하고 치과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얼굴 기형과 암을 전담으로 수술하는 구강안면외과를 전공했다. 이유는 수술 환경이 너무 열악한 동남아 지역에 입술이 안 붙거나, 입 천장이 안 붙는 아이들이 방치되어 있다고 해서 무료로 수술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연히 대학교 2학년 때 소록도에 방문하게 되었는데, 아버지로부터 소록도의 한센인들의 힘든 삶에 대해 전해 듣게 되었다. 현재는 의학의 발전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는 더 이상 한센병이 발병되지 않지만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과 병을 앓은 후 후유증으로 인해 소록도에 계속 살고 계시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연을 듣고 '이곳에서 진료를 하면서 살아야겠다'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이렇게 그는 27년 째 소록도에 살고 있다. 주변 사람들이 한센병이 두렵지 않느냐고 그에게 물어보기도 하지만, 그는 전혀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아이들의 교육 문제로 잠시 고민하던 시절에 자신의 아이에게 “아빠 소록도 나갈까?” 라고 물어보았었는데, 그때 아이가 울면서 “아빠, 아빠가 나가면 그 불쌍한 소록도 할머니 할아버지 어떡해?”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아이의 응원에 힘입어 이렇게 27년간을 소록도에 머물고 있다.

전염된다고 근처에 가는 것 만으로 불결하게 생각했던 한센인의 집단 거주지.
가족들이 울면서 사정하면서 반대한 그곳을 뚜벅 뚜벅 걸어 들어간 치과의사.
27년이란 긴 시간을 그리고 미래에 더 긴 세월을
이제는 완치된 소록도 주민들과 생활하고 있는 그와 그 가족들

그들로 인하여 세상은 또 다시 감동의 뜨거운 온도가 올라가기 시작한다.

*참조: EBS 초대석과 중앙일보(2012.12.10), SNS의 자료

2021. 12. 12